신님
영화 아가씨 모티브 [깨비사자] 상 본문
그들의 결혼엔 이중성이 존재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정상적이며 서로의 권력과 미래에 대한 든든한 투자였지만 사실 그 내면은 추악하고 더러웠다. 그것의 예시로 이중결혼, 근친, 내연, 폭력성이 침묵에 가려져 있었다.
신이 이 집에 온건 그 추악함의 사생아, 아마 또다시 그 추악함의 희생양이 될 이 집 도련님을 그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기차로 세시간 차로 두 시간, 다시 산길을 따라 한 시간. 꼬박 여섯 시간을 이동해 이곳까지 왔다. 비닐을 덮어둔 가방을 문 계단 위에 올려두고 비옷에 달린 모자를 뒤로 넘겼다. 비가 아슬아슬하게 내려서 처마가 막아주지 못한 모자 안으로 빗물이 고였다.
축축히 젖은 손으로 초인종을 누르자 기대했던 맑은 종소리가 아닌 물먹은 기계가 치익치익하고 울렸다. 세 번을 더 누르고 나서야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중년의 남자가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문을 열어 주었다.
복도는 다시 촛불을 밝혀도 뒷산으로 인해 전혀 환해질 것 같지 않았다. 어둡고 습한 공간을 걸으면서 남자는 자신을 이 집의 집사라고 소개했다.
“앞으로 매일 도련님 미술공부를 지도하실 겁니다. 시간은 오후 8시부터 10시. 도련님은 항상 10시가 넘어가면 졸려 하시니까 그 전에 수업을 마쳐주시면 됩니다.”
신은 대답 없이 집 안을 살피며 걸었다. 음산하고 습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없이 한참 걸어서 짙은 나무문 앞에 다달았다. 남자가 방문을 열자 오래 안 쓴듯한 냄새가 났다.
차갑고 무의미한 냄새.
“여기서 지내시면 됩니다 도련님 방은 바로 저 앞입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하인들에게 시키십시오. 그럼..”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신은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도련님 방이라는 오른쪽 건너편 방문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도쿄대학에서 서양화 전공을 했다지”
어젯밤의 암울하고 축축한 분위기에 비하면 낮에는 환한 기운만 가득했다. 복도를 환하게 비춘 촛불들이 어제의 걱정을 말끔히 씻어 내렸다.
“예”
손을 모으고 선 신의 앞에 이 저택의 주인인 혼카다 후작이 앉아있었다.
“대학을 도쿄에서 나왔는데 일어는 잘 못한다고”
후작이 그럴 수 있냐는 듯 신을 올려다봤다.
“도쿄에서도 독일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독일어와 영어는 금방 배웠습니다.”
백작은 일본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서양의 나라들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렇기에 이런 이력사항은 신에게 큰 득이 되었다.
“조카 녀석은 말이 없어, 자기가 필요할 때가 아니면 말을 잘 안하 지, 수업을 하다가 드러누워 버릴 수도 있고 아예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도 그냥 내버려둬 어차피 그 앤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으니까”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하라는 듯한 말로 들렸다. 오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런 집안에선 이런 일이 흔했다.
어제 비가 온 게 다 꿈은 아니었다는 걸 말해주듯 땅은 촉촉히 젖어있었다. 아직 오후 두 시밖에 되지 않았다.
8시가 가까워지자 집사가 신을 데리러 왔다.
첫날이니 같이 가준다는 말과 함께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말도 없자 집사는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 신을 소개시켰다.
“이분은 앞으로 도련님 미술 수업을 하실 김신 선생님 이십니다.”
후작님이 모셔온 분이니 친절히 대하시라는 주종관계가 엇갈린 것 같은 말도 하고 집사는 나갔다.
방 안은 나이 어린 부잣집 아이가 살 것 같은 공간은 아니었다. 다른 나이 많은 노부인이 쓸 것 같은 장식들이 그대로 있었다.
여는 그 방의 벽에 붙어있는 침대 안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조그맣고 하얀 손가락이 신의 시선을 느낀 듯 쏙 들어가 버렸다.
“도련님 수업하셔야죠”
신이 천천히 침대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두껍고 붉은 색의 이불 아래 숨은 여의 숨쉬는 소리만 들렸다. 이불을 살짝 걷어 올리자 그 안에 얼마나 있었던 건지 더운 공기가 확 끼쳤다.
그런데 그 더운 공기 안에서도 좋은 향기가 나는 거라 신은 의아했다.
그리고 여를 보았다.
붉은 색의 이불은 도련님의 입술과 맞춤 색 이었나 보다. 새하얀 얼굴에 두 볼과 입술만 붉었다.
햇빛 아래에 한번도 나가보지 않은 것처럼 햐안 얼굴에 뭘 보고 있는지 무심한 눈빛이 보였다.
분명 그 안이 덥긴 했는지 땀으로 붙은 머리카락은 태어날 때 그대로 흑색이었다.
그 모습에 신의 신경이 곤두섰다.
배를 간지럽히는 무언가가 그를 건들었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서 옳지 못한 생각이 스쳤고 그것 때문에 신의 귀가 달아올랐다.
“수업..”
다시 입을 열었지만 조그만 틈도 안 보이는 여의 입술이 그의 시선을 훔쳐가 버려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신이 여라는 존재에 정신이 팔렸을 때 여는 오랫동안 누워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는 손도 대지 않고선 침대가 높아 마른 다리를 달랑거리며 나무마루를 딛고 일어났다.
신은 차마 도련님이 나와 같은 곳을 밟고 서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신의 눈은 자연스럽게 여의 맨발에 고정됐고 그 발이 시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하게 자신의 실내화를 벗어 여의 앞에 놓아두었다.
그러다 여의 눈과 마주쳤다.
둘 다 아무 말 없어서 방안은 고요했다.
신은 먼저 눈을 돌리자고 생각했지만 이미 홀려버려 그럴 수 없었다. 여가 먼저 고개를 돌리고 신은 거절당한 실내화를 들었다.
얌전히 의자에 앉은 여에게 그 의자의 높이도 턱없이 높았다. 그래서 신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실내화를 신겼다. 보드라운 느낌이 들었는지 여가 흠칫 놀라며 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다른 쪽 실내화를 신겨주는 사이 신의 무릎 위에 실내화가 신겨진 쪽의 발을 올렸다.
그 작은 행동에 신은 온 몸의 감각이 그 쪽으로 쏠려 정신이 혼미해졌다. 신이 삼 초쯤 굳어 아무것도 하질 못하니까 그제야 발을 내렸다. 그 사이 신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는데 그가 본 것은 여가 걸치고 있던 흰색 와이셔츠 안 이었다.
신이 본 것은 그 안의 비밀과 신의 안에 숨어있던 무언가의 속삭임 이었다.
네가 상상하는 걸 해.
여의 방에서 나온 신의 다리가 무너졌다. 도련님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분명 신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남자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었다. 자책과 이유를 찾는 시간이 지나자 여에 대한 욕망이 생겼다.
그날 밤 신의 꿈에 여가 나왔다.
앉아있는 신의 아래에 무릎을 꿇은 여가 그의 물건을 작은 입안에 담고 있었다.
‘도..도련님”
급하게 막아서는 신의 손길에도 여는 그저 새까만 눈동자를 위로 한번 올렸을 뿐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신음을 참는 신의 팔뚝에 힘줄이 돋아났다. 방문 밖으로 오늘따라 시끄럽게 사람들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신은 입을 더 다물었다.
느릿느릿한 여의 입에 신은 조금 더 간절함이 생겼다. 몸을 비틀다 허리를 몇 번 쳐 올리자 목젖을 건드린 듯 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신이 여의 머리를 움켜잡고 한 치의 배려도 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도련님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 게 보였고 가득 찬 입과 신의 성기 틈으로 새어 나오는 타액도 보였다.
그래도 신은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마음껏 범하고 도련님을 괴롭히고 지쳐 쓰러질 때 까지 깊게 박아 넣고 싶은 게 지금 그의 마음이었다.
‘내 도련님’
여의 입안에 사정 할 때 여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렇게 말했다.
그 꿈은 정말이지 신이 가진 관계에 대한 환상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도련님이 아니면 흥분을 할 수 있을까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네가 야해서, 행동 하나하나가 다 유혹적이고 관능적 이여서.
그 때부터 신은 여가 눈에 밟혔다. 방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도 가끔 나오면 후작에게 불려가 글 공부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수업은 계속했다. 하지만 여는 침대에서 잘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첫 날 모습을 보여준 건 정말 큰 결심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젠 고집을 부려가며 이불을 감싸 안고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곤혹을 겪는 것 신이었다. 한번은 신이 이불을 강제로 빼앗고 여를 안아 올려 억지로 의자에 앉힌 적이 있었다. 그때 여가 울었다. 서러운 듯 굵은 눈물 방울들을 뚝뚝 떨어트리며 우는데 마치 인형인 것처럼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고 울었다. 그 장면은 신에게 여가 나왔던 그 날의 꿈을 생각나게 했다. 당황한 신이 여에게 이불을 돌려주었고 여는 이불을 끌어안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오늘도 그 안에서 나오지 않으실 겁니까?”
신이 침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이불을 걷어 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신.”
신은 처음에 바람 부는 소리를 잘못 들은 줄 알다가 몇 초 지나고 나서 그게 사람이 낸 소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련님?”
이불 안에서 하얀 손이 삐죽 나왔다. 신은 그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여린 손. 한 쪽 손을 잡아 주자 다른 쪽 손도 나왔다. 그 손도 잡아주었다.
“….그림…”
“그림을 그리실 겁니까?”
손만 밖으로 내 놓고 얼굴과 몸은 여전히 이불 안에 있었다.
“…..너가..”
“그려…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였는지 이불이 살짝 흔들렸다. 신은 마침내 여가 무언가 표현을 한 것이 기뻐 알았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여가 이불 밖으로 나왔다.
“추워.”
따뜻한 이불 안에만 사니 이 곳이 추울 만도 했다. 신은 벽장에 있던 담요를 꺼내와 여의 어깨에 둘러준 다음 흘러내리지 않게 묶었다. 신이 움직이는 내내 여는 신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신은 여를 의자에 앉게 했다. 그러고 나선 뭘 그려야 하나 찾기 시작했다.
“나.”
“예?”
“나를 그려줘.”
석양이 창문 너머로 들어와 신의 얼굴을 붉혔다. 신은 자리에 앉아 연필을 들었다. 그가 그렸던 어떤 그림보다 힘든 시작이었다. 대충 머리와 몸통의 선을 따고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다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난관이었다. 신은 여를 힐끗 올려다 보았다. 힘 없는 눈빛으로 신을 바라보고 있던 여가 길게 하품했다.
“움직이시면…안 되는데..”
신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했다. 여는 졸린 듯 눈을 깜박거렸다. 신의 눈에 물잔이 들어왔다. 잔을 가져온 신이 여에게 그걸 주고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있으라고 했다.
여는 물잔과 신을 번갈아 보다가 입 안에 반쯤 물을 흘려 넣었다.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신의 침 삼키는 소리만 쓸데 없이 큰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림에 집중하던 신의 귀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여가 입 안에 물고 있던 물을 입술 틈 사이로 흘려버렸다.
“괜찮…”
여가 신의 말을 막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신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여가 신의 손을 끌어 당겨 자신의 몸에 가져다 댔다. 이성의 한계선을 넘을 뻔 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도 자세하게 그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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