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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님

N O I R [깨비사자,김신왕여] 본문

깨비사자

N O I R [깨비사자,김신왕여]

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 2017. 3. 19. 23:57

N O I R

 

 

 

.

1. 검은

2. 암흑의

 

 

 


너에게 내 눈길을 주고, 마음을 주고, 마침내 내 목숨을 바친다.

 

 

 

너의 눈길을 훔치고, 마음을 훔치고, 마침내 네 목숨을 훔친다.

 

 

 

 

 

 

왜 우리는 거짓말 속에서 사랑을 하게 된 걸까.

 



 

prologe

 

너는실수하는 거다....”

 

새벽의 얼음장 같은 공기 안에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나이 든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앞에 나와있던 남자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선 손에 쥔 권총을 만졌다.

 

 

 

실수라고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남자는 총구를 한 때 자신이 존경했던 자신의 우상에게 들이밀었다. 나이 들고 주름진 얼굴에 남은 건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없으십니까.”

 

삶의 회한이 가득한 얼굴과 대조되게 남자의 얼굴엔 앞으로 이룰 모든 날 들에 대한 기대와 확신이 들어차 있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끝나지 않을 거다.”

 

마지막 유언을 그렇게 낭비하다니. 당신한테 남은 게 뭐가 있다고.

그래도 한 조직의 대부였다는 걸 인정해서 준 마지막 배려였다. 이마에 닿은 총구를 단 한 번도 겁이 난다는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이래서 당신을 존경했지.

 

 

 

얘들아 인사해라! 형님 가신다!”

 

남자의 외침에 뒤에 서 있던 수백 남짓의 남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가 창고 안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을 외쳤다.

 

 

 

안녕히 가십시오, 큰형님.”

 

남자는 웃었다. 이제 정말 나의 세상이야.

 

 

후드득.

총성과 함께 세월만큼 붉어진 피가 남자의 얼굴에 튀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리의 쪽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 쓰러진 송장은 돌아보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한 사람을 보내고 그 자리에 남자가 섰다. 그가 가는 길, 허리를 숙이고 앞을 터준 사내들은 이제 그의 수하였다. 남자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아직 굳지 않은 혈흔은 쉽게 지워졌다. 그게 죽은 자와 같아서 남자는 비웃었다.

 

 

 

안쓰럽네 당신도, 자식 하나 없이 이렇게 죽고.

 

 

 

조직의 큰형님 자리. 말단에서부터 시작했던 김신의 깡패인생 17년만에 그 명패를 거머쥐었다.

 

 

 

-1-

 

 

 

신은 죽은 사람이 남긴 물건들을 하나씩 건드리며 지나갔다. 쓸데 없이 깡패 새끼 방에 왠 책들이 많았다. 책상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신은 사진이 보이지 않고 앞으로 엎어진 액자를 발견했다. 자리에 앉아 액자를 들어 올렸다. 어린 남자애가 회전목마를 타며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 신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어린애와 연관 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인간이 아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더욱이 아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이 애가 정말 망자의 아들 이라면신은 그 흐릿한 흑백사진을 액자에서 꺼내 양복 안 주머니에 넣었다.

 

 

만약 이 애가 정말 망자의 아들이라면 죽여야지 뭐 어쩌겠는가.

 

 

 

 

 

 

“…김신이 대부의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한줄기의 빛도 들어오지 못하게 설계 된 방은 희망조차도 잃어서 검은 공기를 떨게 하고 있었다.

 

 

 

준비해.”

 

이미 오래 전부터 일이 이렇게 될 걸 우리 예상하고 있었잖아. 이 방에서 단 한 가지만 빛나고 있었다. 무색에 가까운 피부에 검은 눈동자만이 반짝거렸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

재물, 용기, 명성, 그리고 당신의 목숨까지.

 

 

당신의 모든 게 내 발 아래에서 짓뭉개질 수 있도록.

 

 

 

 

 

 

이름은 왕여. 나이 27. 가족관계는 어릴 때 양 부모에게 입양, 현재 부모 양측 모두 사망. 알아 본 결과 의대 졸업 후 외국에서 1년간 쉬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는 이렇게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가족관계도 깔끔한 사람이…”

 

 

알아. 그렇게 해.”

 

신은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책상 위로 던졌다. 조직개편 후로 이곳 저곳에서 크고 작은 시비를 걸어왔다. 영왕쪽의 움직임은 아직 포착되지 않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신의 비서인 유준이 필요하다고 한 사람이 의사였다. 정밀한 수술까지는 필요도 없고 그저 간단한 상처나 봉합시술 정도가 가능한 의사.

 

 

신에게 올라온 여러 개의 파일 중에 선택 된 사람이었다. 왕여.

 

 

 

 

저기여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 되는데요.”

 

누군가 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하얀 얼굴이 추위로 인해 귀와 볼만 빨갛게 얼어 있었다. 남자는 말똥말똥하게 눈을 뜨고 신이 들고 있는 담배를 가르켰다. 그러자 신은 보란 듯이 볼이 옴폭 패일 정도로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쪽이 무슨 상관 입니까.”

 

신은 입 안 가득한 담배 연기를 허공에 흩뿌렸다. 흰 연기는 바람 속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남자는 아까보다 조금 붉어진 얼굴로 쏘아붙였다.

 

 

여기 버스정류장이거든요!”

 

그래서요.”

 

버스정류장에서 담배 피우시면 안되죠! 여기 공공장손데!”

 

신 보다 머리 하나 두 개는 작은 키에 바락바락 대드는 게 여간 센 깡은 아니지 싶었다. 재미가 있어진 신은 아직 덜 탄 담배를 꺼트리고 아예 새 담배를 물었다.

 

 

학생입니까?”

신이 잔뜩 열이 오른 남자를 바라보며 불을 붙였다. 지금 이 시간에 학교가면 지각 아닌가. 신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9 30.

 

 

학생 아니고요, 저 성인이거든요. 스물 일곱.”

 

 

그때 신을 태우러 오기로 한 차가 도착했다. 남자가 다시 담배에 대한 말을 꺼내려던 차에 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

남자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니, 김신.

 

 

 

부산 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영왕쪽 움직임은 확인 되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보고해.”

 

예 형님.”

 

가봐. 신이 손짓으로 유준을 방에서 나가게 했다. 창가 쪽으로 다가가 블라인드 사이를 벌려 밖을 내다보았다. 빌딩 안으로 들어오는 총총거리는 발걸음이 보였다. 이곳 분위기와는 영 반대인 인영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다가 신은 인상을 찡그렸다.

 

 

정류장..?”

 

분명 아침에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담배 피우지 마세요! 하고 소리쳤던 그 남자가 맞았다. . 신은 저 남자가 왜 여기로 오는 걸까 생각하다가 남자의 말을 생각해냈다.

 

 

학생 아니고요, 저 성인이거든요. 스물 일곱.’

 

이름 왕여, 나이 27..’

 

 

유준이 보고했던 의사의 신상과 정류장이 어렴풋이 맞아 떨어졌다. 신은 그제야 받았던 파일 속 얼굴과 저 남자의 얼굴이 똑같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멍청하긴…”

신은 자리로 돌아와 전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오늘 의사선생 오는 날인가?”

비서실에서 연락을 받은 유준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신은 전화를 바로 끊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신이 지켜보던 남자는 [의무실] 이라고 적힌 방문을 열었다. 흰색으로 칠해진 방 안에 의료용 도구들이 손길을 기다린 채 놓여있었다. 그래도 의사선생이라고 많은 배려가 돋보이기는 하는데 남자는 헛구역질을 하며 순간적으로 비틀거렸다.

 

 

더럽고 역겨워도 결국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을 위해. 떨리고, 두렵고, 여전히 잘 해낼 수 있을까에 의구심이 듭니다.

 

 

[왕여]

 

이름표가 매달린 의사가운이 방 구석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분명 부드러운 천인데 여에겐 숨통을 옥죄어 오는 사슬 같이 느껴졌다.

 

 

나를 잊지마! 내 복수를 잊지마!’

정말과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다시금 여의 머리속에 울렸다. 잊지 않았어, 잊지 않았다고. 여는 겨우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똑똑

 

 

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심호흡으로 겨우 정신을 다잡은 여가 문을 열었다.

 

 

맞네, 정류장.”

 

신은 한쪽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문 기둥에 기대 비스듬히 서 있었다. 방 안을 슥 둘러본 신은 여의 의사가운을 발견했다.

 

 

왕여. 그쪽 이름이 왕엽니까?”

 

신이 여의 얼굴을 다시 보고 피식 웃었다.

 

 

여의 눈에 신의 웃는 얼굴이 흐릿하게 번졌다가 다시 선명한 모습을 찾았다.

 

 

네 또 보네요.”

다행히 굳어버렸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당신의 눈길을 마음을 결국엔 목숨을. 누군가에겐 신기하기도 하고, 조금 반갑기도 한 재회, 누군가에겐 예정 되어 있던, 반가울 수만은 없는 재회. 그렇게 둘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여는 신이 그렇게 첫 날부터 자신을 찾아오고 이름을 알아가는 등의 행동을 했을 때까지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신에게 아주 잠깐의 신기한 일 이었을 뿐이었고, 더 이상 신의 발걸음은 의무실로 향하지 않았다.

 

여는 불안해졌다. 다른 누가 보기엔 이건 이상할 것 없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여에게는 당연해서는 안 되는 간절함 같은 것이었다.

 

 

의사 선생님 대기 하십시오. 큰형님이 다치셨습니다.”

 

이럴 때 생긴 신의 부상은 어쩌면 하늘이 여에게 준 기회였다.

 

 

 

여는 다친 사람을 앞에 둔 것 같지 않게 생글생글 웃으며 의료용 침대에 누운 신의 찢어진 옆구리를 소독용 알코올을 묻힌 천으로 닦았다. 그러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는지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조직 두목이나 되신 분이 엄살은.”

 

여의 말에 신보다 신의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유준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먼저 내비쳤다. 여는 신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 치료가 끝나자 신의 배를 툭툭 두드렸다.

 

 

다행히 상처가 그렇게 깊지 않아도 크니까 조심하시고요, 의무실 가까우니까 매일 소독하러 오세요. ...”

 

? 김신씨?”

 

여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주어 도발한 게 효과가 있었다. 유준이 허리에 매달린 총을 꺼내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에 겨누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지만 여는 오히려 더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김신씨 라고 부르면 안돼요? 이름이 김신아니었어요?”

 

유준이 여에게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신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맞아, 김신. 못 들어본 지 좀 되서 잊을 뻔 했는데 의사선생이 부르네. 그 이름.”

 

비웃는 건지 아님 저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것 같은 정적이 잠시 흘렀다. 그 숨막히는 정적을 깨고 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세요. 치료 끝!”

 

의사가 환자를 쫓아내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데.”

 

, 그리고 절대 무리한 활동 하시면 안돼요. 상처 벌어질 수도 있어요.”

 

여가 신의 말을 무시하고 상처를 봉합한 부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지.”

 

그러기는.. 순순히 그러마 하고 대답은 했지만 분명 저 남자는 저 몸으로도 이곳 저곳을 움직이고, 총을 겨눠 적을 쏘고, 적의 총탄을 피하고, 지친 동료를 이끌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여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김신은 상상 속처럼 지독한 악마에 사람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 선 모습은 아니었다. 조금은 무섭고, 또 조금은 경계 되지만, 그는 너무 소년 같고, 아무에게나 막 대하지 않고 친절했으며, 또 이상하게 말을 잘 듣는 강아지 같기도 했다.

 

 

여기 온지 일주일.

여는 의무실 밖의 조직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의사는 사람들과 금방 친해졌다. 다들 그에게 덩치에 안 맞는 온갖 애교를 부려가며 친절했고, 의사쌤 이거 드셔보세요, 의사쌤 이거 같이 하실래요. 하고 말도 자주 걸어왔다. 그래서 의무실은 금방 환자보다 환자가 아닌 사람이 더 늘어나 북적북적하게 되었다.

 

 

 여를 싫어하거나 경계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능력 있는 의사인 여에게 조직원들 모두 그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 김신씨!.”

여는 사람들과 있던 도중 신을 발견하면 그렇게 불렀다. 그럼 다들 불에 데인 것 마냥 호들갑을 떨며 우리 형님한테 그러시면 안됩니다! 쌤 혼나요!’ 하고 말렸다. 유준 이하 모든 조직원들이 난리가 나서 여의 입을 막느라 급급할 때 신은 그저 여를 빤히 보거나 헛기침을 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코너를 돌아 여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뒤를 힐끗 돌아보고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렸다.

 

 

 

 

이 암울하고 더러운 뒷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제 편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단순히 그것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다. 다들 머리만 조아리기 바쁜 신의 앞에서도 여는 그들과 달랐다. 인사를 할 때도 그저 두 손만 이리저리 흔들면서 인사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몇 번 저러다가 주변에서 이런 저런 말을 듣고 무서움에 피하겠거니 싶었는데 오히려 다음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김신씨! 하고 부르며 뛰어오기까지 했다.

 

 

 

 

일반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 이라며 신의 전용 엘리베이터에 실례.’ 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무단으로 탑승하지를 않나, 단호하게 나가라는 말에 저 여기까지 지각 안 하려고 뛰어 오느라 다리가 너무 아파요.’ 하고 되도 않는 애교를 부려가며 신의 팔을 붙들고 매달리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마다 신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대 놓고 앞에서 웃지는 않았지만 이 삭막하고 외로운 생활이 여 때문에 재미가 생겼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 눈길이 가고, 여의 목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고 주변인들이 몰랐으면 싶어서 여에 대한 어떤 사소한 것도 입에 담지 않았다. 의심도 했다. 자신이 왜 이러는 지 왜 이렇게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이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지. 사랑? 글쎄, 신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 이상한 감정을 사랑인가? 그렇다. 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감정은 신의 머리에선 아무것도 아닌 감정.’ 이 되었지만 그건 신의 심장에서 작은 씨앗이 되어버렸다. 행복의 시작일지. 불행의 연속일지 모르는 감정의 씨앗’.

 

 

 

 

기존 조직에 몸 담고 있다가 이전 대부님께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명단 입니다. 안에 이유와 현재 소재지까지 적혀 있습니다.”

신은 명부를 뒤적이다가 눈에 띄는 이름을 발견했다.

 

 

김정철…”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하던 신은 그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처음 신이 이 조직이 들어왔을 때 대부의 오른팔로 있던 사람이었다.

 

이 인간은 왜 이유도, 소재지도 아무것도 없지?”

 

김정철은 현재 생사여부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김정철의 가족 모두 이전 대부님께 몰살 당하고 나서 김정철도 자취를 감췄습니다.”

 

잠적이라..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김정철.

당신이 왜 숨었는지. 당신의 가족은 왜 죽어야 했는지. 당신이 뭘 알았거나, 계획했다면 그게 뭔지. 형님은 왜 당신에게 이런 벌을 내렸는지.

 

이 자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았다.

 

어디 있는 지 알아내서 내가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해.”

 

.”

 

 

신은 얼굴에 길게 칼자국이 남아 있는 험악한 인상의 사진 속 남자를 한참동안 보았다.

 

 

 

1층 로비를 걸어나가는 신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건 여였다.

 

김신씨!”

신이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역시나 의사가운을 걸친 여가 신을 발견하고 두 손을 크게 흔들면서 뛰어왔다.

 

어디 가세요?”

 

그냥.”

신은 집으로 그저 집이라고 대답하면 될 걸 얼버무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왜 자신이 목적지를 우물쭈물 하고 있는 지 의아해졌다.

 

아 그렇구나. 그럼 저랑 놀러가실래요?”

 

?”
뜬금없이 놀러가자는 여의 말에 신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싫으세요?”

싫다는 말에 또 차마 대답을 못하는 신을 여는 네? 하고 되물으며 대답을 요구했다.

 

, 아니 뭐..”

 

그럼 여기서 10분만 기다리세요. 저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올게요.”

여의 말에 신은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의무실로 돌아온 여는 이를 갈며 책상 위에 올려둔 영화 티켓 두 장을 집어 들었다. 자신이 예상한 것 보다 김신은 움직임이 없었다. 먼저 이렇다 할 말도 의심할 만한 방문도 없었다. 마음이 급해지자 오히려 여가 더 매달리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여는 자각하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가기 전 거울 앞에서 억지로 두어 번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웃음으로 김신을 속일 수만 있다면, 제발 그럴 수만 있다면.

 

 

외투를 껴 입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여는 아까 그 로비 한 가운데 가만히 서 있는 신은 발견했다. 순간 여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신은 바지 주머니에 비딱하게 찔러 놓은 손을 빼더니 여를 향해 손을 올렸다가 이내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엉거주춤하게 도로 내려버렸다. 떨림을 참기 위해 주먹을 꼭 쥐고 신의 옆으로 왔다.

 

 

우리 뭐 하나?”

신의 입에 우리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고 어색했다.

 

영화 보실래요? 저 티켓 있거든요.”

 

 

 

신은 밥을 먹을 건데 구지 팝콘을 먹어야 하겠냐며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결국 양손 가득 팝콘과 콜라를 들고 화장실 앞에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벽에 기대고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자기 주변에 자신과 똑 같은 모습으로 화장실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들이 여럿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신이 저 인간들은 왜 다 저러고 있는 거야. 하고 한심하게 생각할 때쯤 여자 화장실에서 한 여자가 나와 팝콘과 아이스커피 두 잔을 들고 있던 남자의 팔짱을 끼고 복도를 지나쳤다. 하나 둘 그렇게 사라지자 신은 이 남자들이 왜 여기서 이렇게 멍청한 얼굴로 서 있는 지 알아차렸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이윽고 여가 나와 신에게 다가오자 주변 남자들의 시선이 뭐야 저것들은 하는 눈빛으로 신과 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 화장실을 만들어서 다녀오는 건가?”

신은 괜히 화를 벌컥 내며 여의 품에 콜라를 억지로 떠넘겼다. 붉어진 얼굴을 돌리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신을 여가 김신씨 어디 가세요! 하고 따라왔다.

 

 

 

영화 재미 있었죠.”

여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렸다. 신이 가자는 대로 따라온 식당에서 둘만 방 안에 있었다. 주변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신의 이유에 여는 오히려 이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주인공 이름이 뭐였지?”

 

? 영화를 보기는 한 거에요?”

 

앞에서 쪽쪽거리고 있는데 영화가 눈에 들어 왔겠어?”

 

러닝타임 내내 신과 여의 앞 자리에 앉아서 서로의 입술에 죽고 못 살던 그 커플들을 말하는 거였다.

 

 

그래도 전 좀 부럽던데요.”

 

그런 게 부러워?”

 

. 사실 저는 외톨이거든요. 가족도, 친구도 없어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던 신은 반응 없이 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신씨는 친구 많아요?”

어떻게 해서든지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그런 불쌍한 모습이 아니기를 바라며 여가 물었다.

 

친구 말고 적은 많지.”

웃는 것인지 모를 쓴 미소가 입에 걸린 신은 음식이 들어오자 입술 사이 틈을 조금도 벌리지 않고 있었다.

 

 

적이 많은가 봐요.”

그런 신을 따라서 여도 종업원이 문을 닫고 다시 방 안에 둘만 남을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많지.”

 

누군데요?”

 

여러 가지.”

 

신은 그릇 위 고기를 썰어 입으로 가져갔다. 여는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역겨워졌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수가 몇이고 피를 본 것이 얼마일 텐데 저렇게 태연하게 아직 피가 남아있는 살덩이를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을까.

 

설명 좀 해주면 안 되요? 나도 화룡 가족인데.”

애써 넘어오려는 역겨움을 누르고 여는 최대한 밝게 말했다.

 

 

가족 없다며.”

 

에이. 피 안 섞인 가족이 최근에 생겼어요. 됐죠?”

 

 

신은 잠시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화룡은 반도 내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손 꼽히는 조직이야. 그만큼 적도 많을 수 밖에.”

 

가장 큰 적은 누군데요?”

 

영왕. 몇 년 전쯤에 갑자기 나타났지. 지난 5년간 사사건건 온갖 일에서 우리와 마찰을 일으키고 있고. 한 번 제대로 박살을 내려 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사무실을 싹 비웠더군.”

 

 

 

여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신이 그걸 삼키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꼬리를 잡을 수가 없어. 아니, 머리가 존재하는 지도 몰라. 그 놈들이 우리의 가장 큰 변수이자 적이지.”

 

 

신의 얘기가 끝나고 여는 떨림 가득한 손을 신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도록 식탁 아래로 끌어내렸다.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여를 보며 신은 그저 참 겁도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사람이 모두가 겁내는 자신만은 겁내지 않는 다는 걸 상기하고 웃어버렸다.

 

 

여는 들어오는 종업원에 시선이 쏠려 신의 웃음을 보지 못했다. 들어온 종업원은 주방에서 실수가 있어 좀 늦었다며 사과 인사와 함께 신이 음식 주문과 함께 시킨 와인을 들고 있었다.

 

 

여의 잔에 진한 핏빛 와인이 담기고 여가 아직 멍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찰나에 신은 와인을 거절하고 빈 잔을 그대로 두었다. 여가 그걸 알아챈 것은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에 도착해서였다.

 

 

 

우리 오늘 굉장히 데이트 한 것 같지 않았어요?”

신의 설명 이후 식사 도중 한 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던 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런 게 데이트 인가?”

여가 벨트를 다 채울 때까지 기다리던 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님 비아냥거리기 위해 하는 말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설마 데이트 한 번도 안 해본 건 아니시죠?”

여는 정말 모른 다 쪽에 걸었다. 술을 마신 건 자신 혼자이고 신은 농담을 즐길 만큼 유머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잘 아는 바가 있는데 거기 가서 술 한잔 하던지.”

 

정말요? 정말 데이트 안 해봤어요?”

 

닥쳐
처음으로 신의 입에서 여에게 하는 험한 말이 나왔다.

 

 

그럼.. 내가 첫 데이트 상대인가.”

“….”

왜 이번에는 닥치라고 안 하시네요.”

신은 운전하다 말고 여를 돌아보았다. 저 순하고 밝기만한 얼굴에 닥치라는 비속어가 묘하게 어울려서 야해 보이기 까지 했다.

 

 

어어. 앞에 보셔야죠.”

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겼다는 걸 모르는 지 신의 고개를 여는 다시 앞으로 돌려버렸다.

 

 

 

“… 잘 아는 바가 김신씨 집이에요?”
여는 신의 집 현관에서 차마 발을 못 떼고 서 있었다. 왜 이 사람이 나에게 전혀 꼬리 하나라도 잡을 수 없는 틈도 내어주지 않다가 갑자기 집으로 들이는 지 이상하고 위험한 상상만 하게 했다.

 

혹시 이런 걸 좋아하나. 원 나잇. 뭐 그런 거.

 

, 난 다른 곳에선 뭐 잘 안 마셔서.”

여의 얼굴이 아까 그 와인보다 붉게 달아올랐다. 상상한 모든 것들이 본인의 수치로 돌아와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다. 다행이 그와 동시에 현관 센서 등이 꺼지는 바람에 들키지는 않았다.

 

 

왜요. 뭐 누가 막 영화처럼 마실 것에 약 타고 그럴까 봐요?”

괜히 민망하진 여가 무리수의 질문을 던지며 볼을 긁었다.

 

 

기도 안 차다는 듯한 비웃음이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뭐 이런 대답이 돌아 올 줄 알았는데 잠잠했다. 여가 신을 쳐다보자 신은 대답 대신 여의 발 앞에 실내화를 툭툭 던졌다. 그러고 보니 식사 중에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던 신이었다.

 

 

헐 설마진짜요?”

보르도 로난 바이클리네. 빈티지가 오래 된 건 아니지만 향이 색다르고 뒷맛이 깔끔하게 떨어져서 어린 사람들이 좋아하던데.”

졸졸 따라오며 묻는 여에게 외운 건지, 아님 뭘 보고 하는 건지 신이 한 손으로 와인을 잡고 설명하는 게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소리인 것 같아 여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 둘이. 그것도 사실 그닥 친하다고도 할 수 없고 소소한 수다거리도 없는 둘이 술과 함께 먹을 안주는 있어도 말 할 안주는 없었다. 영화 한 편을 틀어 두고 둘 다 쇼파에 앉았지만 내 눈에 영화는 들어 오지 않았다.

 

 

좀 천천히 마시지. 이미 취한 것 같은데.”

신이 안주로 차린 마른 견과류들과 치즈는 입에 맞지 않아서 먹지 못했다. 복잡한 마음에 말도 없이 술만 들이켰으니 눈 앞이 벌써 돌았다.

 

 

김신씨.”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은 신이 주신 기회일까 아니면 나를 벌 주시려는 함정일까. 둘 다 지금의 나에겐 가릴 것이 없었다.

 

 

 

.”
도박이었다. 그 순간 내가 신의 입술을 훔친 것은. 그가 나보다 급할 것이 없었으니 마신 술의 양이 적었고 내 가득한 알코올 향은 무미건조한 입술에 여운을 남기고 떨어졌다.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닌 걸까. 아니면 나 혼자 버티는 게 힘들어서, 지쳐서 위로 받고 싶은 걸까. 나는 투정이라도 부리듯 다시 신의 목을 끌어 안아 애 처럼 애정을 갈구하듯 그의 입 안을 헤집었다.

 

 

 

 

신은 여를 제지하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굴지도 않았다. 이런 일이 아주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당한 건 처음이라 남자라고 편하게 생각 해 집에 데려온 것이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중 이었다.

 

 

여의 키스는 서툴렀다. 스물일곱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서툴고 집중이라고는 될 수가 없는 키스였다. 생각보다 거부감이 들지는 않고 오히려 끙끙대는 여의 모습에 아예 자신의 허벅지 위로 안아 올려 판을 깔아주었다. 여는 허리에 닿은 손에 소름이 끼쳤지만 눈을 질끈 감고 참았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떼어내고 이번에는 신의 목에 고개를 묻었다.

 

 

 

, 거긴 안되.”
옷으로 가려지지 않아.

 

제지하려는 신에 여는 오히려 더 기를 쓰고 떨어지지 않으려 매달렸다. 신의 심장박동이 느껴지는 곳을 말랑하게 핥고, 잇자국을 내도 얇은 입술로 전해오는 신의 심장박동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쓸데 없이 이런 곳에서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신에 오히려 여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신은 여의 심장이 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빠르고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바람으로 흩어질 것 같은 그 진동에 신은 여의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심장을 누르듯 그 위를 배회했다.

 

 

이미 단단하게 서 있는 유두를 두어 차례 꼬집어 비틀고 굴곡 없이 판판한 가슴팍을 더듬다가 남는 손을 여의 옷 안에 마저 밀어 넣고 길게 선이 난 여의 등과 군살 없이 마른 배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수치와 역겨움이 정신적으로 공존해도 술에 먹힌 몸은 솔직하게 반응했다.

 

!..”
여가 찌릿하게 뭉쳐오는 느낌에 신의 목에서 고개를 들었다.

 

 

곤란하네.”

거실 벽에 달린 거울을 본 신은 이미 울긋불긋해진 자신의 목을 난감하다는 듯이 보았다. 말릴 틈도 없이 여는 반쯤 발기해 불룩해진 앞섬을 신의 아랫배에 비비며 엉덩이 아래로 반응 없는 신의 물건을 흥분시키고자 움직였다.

 

 

 

의사선생 취향이 이쪽이었나?”
여는 대답 대신 신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반반한 얼굴로 왜 남자들만 우글우글한 곳에 온 이유가 높은 페이만은 아니었던 거지?”
놀리는 신의 말에도 여는 기어코 신의 옷을 벗겨냈다. 신도 장단이나 맞춰주자 싶어서 여의 옷을 벗겨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혀를 움직였다.

 

 

.., 김신씨..”

따뜻한 혀가 질척이며 맨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 느끼는 떨림이 겁인지, 흥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여가 신을 밀어내고 신의 다리 사이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설마.”
반신반의하는 신의 목소리에 여는 대답 대신 그의 바지버클 위로 손을 뻗었다.

 

여는 입을 벌려 신의 물건을 가득 머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건 아무것도 없고 그저 어떻게 해야 신이 흥분할 수 있을까 그게 다였다. 볼이 움푹하게 들어갈 정도로 빨아들였다가 사탕을 핥듯 혀를 굴렸다. 그 서툴고 조금은 어리숙한 모습에 신은 기가 찼다.

 

 

이상하게 좋아서. 여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그 동안 이 남자만 보면 이상하게 웃게 되고 남들에게 들키려 하지 않았던 마음이 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여는 술에 취하고 눈 앞에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더 이상 앞뒤 잴 것이 없어져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다시 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
생각보다 빨리 입술이 닿았다.

 

 

다가온 이유가 뭘까.

잠깐의 흥분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사랑 일 리가 없지 않나. 고작 하루를 같이 보냈다고.

 

부질 없는 생각 사이로 신의 고개가 돌아가며 더 깊숙하게 여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뒤를 가르고 들어 온 신에 여는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뒤틀었다. 온 몸이 터질 것 같고 느슨하게 뭉쳐져 있던 온갖 감정이 산산이 조각나며 흩어졌다.

 

 

손을 뻗으면 왜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아프다고 말하면 당신은 왜 미안하다고 말했다.

행복과 흥분의 눈물이 아닌데도 당신은 왜 내 눈물을 닦아주고

추하게 흔들리는 나를 끌어안고 방 안 가득 외설적인 마찰음을 내며

내가 비명과 함께 쾌락의 나락으로 빠져들 때

당신은 왜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오르가즘을 느낄 때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는 도파민이 나온다고 했던가.

그것의 장난으로 지금 내 심장이 이리도 뛰는 걸까.

 

왜 나도 당신의 말에 사랑을 답하고 싶을까.

 

 

 내 복수를 잊지마.’

 

, 지긋지긋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아버지.

 

 

 

쾌락으로 얼룩진 얼굴이 다시 다정하게 입을 맞춰왔다. 반쯤 감긴 눈으로 천장만 바라본 채 눈을 감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이건 다 착각이라고, 이 입술의 주인은 그저 내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라고.

 

 

 

 

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수녀님은 밤마다 모든 아이들을 차례로 무릎 위에 앉혀두고 주 예수님..’ 으로 시작하는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면 나는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척 하다가 실눈을 뜨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눈짓으로 장난을 치거나 혓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면 어느새 내가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수녀님은 한숨을 쉬며 나를 내려놓았다.

 

 

어쩌면 내가 그때 하늘에 보내는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지금 이런 인생을 살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이제 내가 슬슬 눈칫밥을 먹게 될 나이가 되었을 때 아버지라는 사람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내 나이 열 여섯에 아버지가 찾아온 건 위기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었지만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 날부터 나는 그 사람과 내가 너무나도 닮았다는 걸 알았다. 책장 가득 빼곡한 책 등의 취미부터 짙은 쌍커풀에 반 곱슬머리의 신체적인 부분까지. 음식 중에는 계란 요리를 가장 좋아하고 고기보단 채소 종류를 좋아한다는 것까지.

 

 

 

소소하고 작은 공통점일지 몰라도 나는 그런 것 들에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반가웠고, 아버지가 좋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살면서 총 일곱 번의 이삿짐을 싸고 풀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 지 알게 되었고 아버지가 나를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숨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날 지켜줄 사람은 아버지뿐이었고 아버지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이정도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스무 살이 되던 날, 아버지는 집으로 오시던 길에 술을 사왔다며 잠들어 있던 나를 깨웠다. 둘 다 술에 잔뜩 취해 거실 바닥에 뻗어 있다가 아버지는 한탄처럼, 주정의 습관처럼 어머니를 입에 올렸다.

 

 

 

아름답고.. 똑똑했고.. 정말 좋은 여자였지  그만큼 현명했으니까 적당한 때에 위험한 나를 떠날 수도 있었을 거고…’

나는 그 날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아버지는 늙어 있었다. 아버지를 지켜야겠다. 그게 내가 잠든 아버지의 위에 이불을 덮어드리며 한 생각이었다.

 

 

 

 

쌤요. ..? 의사쌤요!”

 

“…”

아 쌤요! 치료 안 해주십니꺼!”

 

.. ? , 어디가 아프다고요?”

여전히 북적북적한 의무실에 여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십니꺼.”

 

 

 

망할 김신이 머릿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게 문제였다. 거봐 지금도 저 문에서 불쑥…?

 

 

안녕하십니까 형님!”
누워있던 사람들까지 멍하게 앉아있는 여를 제외한 모두가 우르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다 나가.”
그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고 빠르게 의무실을 벗어났다. 그제서야 신은 여에게 시선을 주었다.

 

 

안돼, 심장아, 이건 사랑이 아니야. 그러니까 떨리지마.

 

.. 오셨어요.”

내 심장이 좀 이상해서.”

“…”

 

환자가 아프다는데 의사가 왜 그러고 있어.”
그러더니 신은 멋대로 청진기를 여의 귀에 끼우고 여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려두었다.

 

쿵쿵쿵.

 

“..너무 빠르네요.”
손이 닿은 곳이 화끈거려서. 빠르게 뛰는 심장에 자신도 모르게 좋아 버려서 여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정도면 내가 의사선생 좋아한다고 해도 틀린 건 아닌 게 아닌가 싶어서.”
참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신에 여는 어쩌면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런 것 같네요.”

 

그럼 나 또 할 말 있어.”

 

“…”

나랑 두 번째 데이트. 내일 오후 한 시. 일층 로비.”

 

 

행복했다. 행복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는데 나는 행복했다. 그와 길을 걷고, 밥을 먹고, 사랑을 외치며 절정을 맞을 때, 숨막히는 행복이 벅차 올라서 밀려오는 검은 그림자는 애써 무시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꿈이든 환청이든 어디에나 나타나 복수를 속삭이며 괴롭혔다. 그래서 단 수 만 번의 생각 중 단 한번도 행복의 이유가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한번은 사격장에 놀러 갔다. 신은 진짜 총이 있는데 왜 이런 장난감으로 놀아야 하냐며 투덜거리다가도 여의 몸집만한 인형을 타서 여의 품에 안겨주었다. 인형을 안은 여가 걷기 힘들어하자 신이 인형을 한 손으로 어깨에 짐짝처럼 들쳐 매고 앞서 걸었다.

 

 

여가 깔깔 웃으며 김신씨 돌쇠 같아요. 돌쇠야~.’ 하고 놀린 그날 여는 인형 위에 엎드려서 그 인형이 여가 뿌린 사정액으로 더러워 질 때까지 신의 밑에서 엉엉 울다 기절했다.

 

 

 

신은 여를 보면 그저 웃었다. 봐도 웃고, 생각만 해도 웃었다. 일을 하다가도, 누굴 콘크리트에 묻다가도 여만 생각하면 웃어버리는 바람에 신의 소문은 더 흉악하게 퍼져나갔다. 나쁜 효과는 없었다. 천천히 다져가는 입지에 건드리는 적의 수는 줄었다. 하지만 그런 신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여전히 이상하리만큼 아무 움직임이 없는 영왕이었다.

 

 

폭풍전야라고 해도 그 기간이 너무나 길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인지 알 길도 없었다. 심지어 김신이 화룡의 주인이 된 이후 영왕의 움직임이 없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영왕의 주인이 김신 이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똑똑.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유준이 문을 두드렸다.

 

형님, 김정철을 찾았습니다.”

 

 

.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유준이 문을 두드렸다.

 

 

 

어디.”

 

그게 접촉을 시도했으나 김정철이 낌새를 알고 도망쳤습니다. 대신 김정철의 집에서 이런 걸 찾았습니다.”

신의 인상이 찌푸려 지는 것을 본 유준이 빠르게 그의 앞에 내민 수첩에는 김정철이 이전 대부와 했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주변 이웃들의 말로는 술만 마시면 왕욱을 죽일 거다라고 외치며 주정을 부렸답니다.”

수첩 안에는 이전 대부가 살았던 집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이사한 곳 마다 찍어 둔 것이 분명했다. 왜 이걸 모은 것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알아본 바로는 김정철이 영왕쪽에 우리 정보를 넘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그게.. 이전 대부의 지시였다고 합니다. …좀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 이 모든 정황으로는 봐서 이전 대부님이 영왕을 돕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왕욱 그 노인이 영왕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내부에 첩자가 있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영왕은 아무리 비밀스럽게 일을 계획 해도 좁은 그물망을 잘도 빠져나갔다. 왕욱은 당연히 그 모든 계획을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정말 그렇다면 왜. 왜 왕욱과 영왕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도왔단 말인가.

 

 

 

 

들어오세요.”

복잡한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 신은 의무실을 찾았다.

 

 

어쩐 일로 아무도 없군.”

텅 빈 의무실에 신은 마음 놓고 아무 침대나 골라잡고 누웠다.

 

환자 자리에 누우시면 어떡해요.”

여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신의 옆으로 와서 섰다.

 

좀 안아주지.”

투정하듯 팔을 벌린 신의 세상시름 다 짊어진 듯한 얼굴이 갑자기 역겨워서 여는 고개를 돌렸다.

 

싫어요.”

위로를 원했던 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끔 보면 여가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지 의심 갈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 순간 중 하나였다.

 

 

의사선생은 애초에 나에게 그렇게 잘 해 줘 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의사선생 나랑 장난하는 건가?”

 

안쓰러웠다. 저 남자가 어떤 눈빛으로 나를 보는 지 얼만큼 사랑해주고 있는 지도 다 알았다.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드는 건 그래도 나에게 있는 마지막 양심이었다.

 

 

아니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그의 옆에 있은 지 고작 일주일을 겨우 넘겼다. 그 짧은 순간에 빨려 들어간 마음이 커진 것 같아서 여는 가지치기를 마음 먹었다.

 

 

저는 그저 김신씨가 저를 사랑하는 걸 그만두길 바래요.”

어떤 순간에 나를 진심으로 버리기를.

 

결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김신을 진심으로 걱정 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싶었다.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아버지와 김신 사이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은 김신의 편이었고,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은 일종의 힌트였다. 내 정체를 알아달라는, 그리고 그럴 때도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이자, 사랑해 달라는 두서 없는 투정이었다.

 

 

 

그 뜻을 알 리가 없는 신은 화가 났다. 갑자기 이렇게 태도를 바꾸는 게 뭐 하자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을 치우고 달래기 위해 찾아왔는데 오히려 불 난데 기름 붓는 격이 되었다.

 

 

의사선생은 꼭 그래.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웃지 못하고 어두워져.”

 

당신 눈에는 내가 세상 가장 행복해 보였나 보다.

 

 

왜 난 이상하게 그게 나만 보면 그런 것 같지?’

정곡을 찌르는 신의 말에 여는 입술만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싫으면 다른 놈 불러서 뒹굴어.”

 

 

무슨 말을.”

 

이제 알겠네. 의사선생 표정이 그거잖아. 내가 질리고 나에게 지친 표정.”

 

 

 

여는 대답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그를 보내면 다시 나에게 돌아오지 않지 않을까? 그럼 자연스럽게 내가 차이는 꼴이 되어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정답인가 보네.”

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의 옷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칠게 문이 닫치는 소리와 함께 여는 주저 앉았다.

 

 

방을 나온 신은 한참 그 자리에서 잡은 문을 놓지 못하고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여가 나와서 그게 아니라고 해명해 주길 바랬다.

 

 

 

그럼 자신도 순간 뱉어버린 말이라고 미안하다고 할 참이었다. 화를 낸 것은 처음이었다. 여의 얼굴이 찡그려지고 눈을 피하는 건 여러 번 봐왔다. 아직도 여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 신경을 집중했지만 문이 열리는 조금의 움직임이나 말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는 신의 걸음마다 쓰라린 통증이 엉겼다.

 

 

 

내 복수를 잊지마. 저 놈을 죽여! 나를 죽인 저 놈을 죽여!’

 

 

아버지, 더 이상 여가 알던 아버지는 없었다. 그저 분노와 한에 찌든 쉰 목소리만이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세상이 아버지 인줄 알았던 소년은 두려워졌다.

 

 

 

선택은 숨통을 조이며 다가오고 있었고, 오랜 약속과 기약 없는 사랑이 그 선택지였다.

 

 

 

 

왜 왔어요.”

채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고민에 빠진 여의 앞에 기약 없는 사랑, 확신 없는 사람이 먼저 찾아왔다.

 

 

아파서.”

어릴 때부터 신은 돌아가는 방법을 몰랐다. 아니 막힌 길이 없었기에 돌아가는 방법의 필요 없었다. 그래서 지금 막혀버린 직진 통로에 일단 돌부터 던졌다.

 

 

어디가요.”

김신의 직진을 방해 한 사람은 그저 순한 눈을 한 살인자를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다.

 

 

마음이.”

 

“..그거 아무 병도 아니니까 그냥 가세요.”

 

 

병 맞는 것 같은데.”

 

 

심장이 막 아프고 갑자기 빨리 뛰었다가 숨 멎을 듯이 멈추어 버리면 그거 병 아닌가.”

 

무슨 병인데요.”

코웃음을 친 여가 팔짱을 끼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신을 바라보았다.

 

 

 

 

상사병.”

 

, 정말이지 이 남자는 위험했다.

방금도 심장이 너무 빨리 내려앉아서 솔직한 직구가 그걸 때리고 지나갔다.

 

 

 

사랑해. 몇 번을 더 말하면 화 풀어줄 건가?”

 

 

 

눈물이 심장부터 뜨겁게 올라와서 고였다. 담담하고 절실한 사랑고백에 찌르르 느껴지는 흉통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럼에도

 

 

“…한 번만 더요.”

 

절대 울지 말아야지. 신의 앞에서 약해지지 말아야지. 슬퍼지지 말아야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가장 안쪽 숨어있던 와 닿는 현실에 여는 굴복했다.

 

 

사랑해.”

 

 

달큰한 입술에 소금기 가득한 눈물은 방해였다.

 

 

흔적.

 

 

 

그가 나에게 남긴 모든 흔적은 과녁이 되어 아버지가 쓴 화살들이 끊임 없이 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차라리 나를 죽여요. 나를 죽여주세요 아버지.

 

 

 아니, 그 놈을 죽여.

 

결국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나는 그를 사랑 할 수 없었다.

 

 

 

김신씨.”

 

.”

맨 몸이 닿은 곳은 감각이 없었다. 시각, 청각, 이 두 감각만이 깨어서 순간을 담으려고 하고 있었다.

 

 

사랑이 모든 걸 해결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어도. 내가 그 사람의 아들이어도.

 

 

지금은.”

피곤의 절은 목소리는 다음에 이어지는 대답이 한참 없자 이내 잠에 빠졌다.

 

 

 

“…너무 믿지 말아요.”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이미 잠이 깊은 듯 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이, 모든 걸 해치기도 하니까요.’

 

 

 

이미 내 모든 게 되어버린 당신을 해칠까 무서워.

 

 

 

 

 

 

여기야?”

무리를 이끌고 온 신은 달동네 김정철의 집 앞을 찾았다. 단칸방 좁은 공간에선 찌든 술 냄새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악취가 풍겼다. 그 틈 사이로 휘발유 냄새까지 온갖 좋지 않은 냄새들이 뒤엉켜 있었다.

 

 

 

뭐해, 뒤져.”

신은 고개를 까딱하고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와 입을 가렸다.

 

형님 이거 떨어뜨리셨습니다.”

옆에 있던 유준이 신이 떨군 물건을 주워 건넸다.

 

, 이거.”

전에 왕욱의 방에서 찾았던 어린 아이의 사진이었다. 안에 들은 줄 모르고 세탁을 했는지 쪼그라들어서 겨우 형체만 알아볼 수 있었다.

 

형님, 화장실 안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조직원 중 하나가 불에 타다만 종이뭉치들을 찾아왔다.

 

사진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준이 그걸 받아 들어 이미 누가 찍혔었는지 알 수 없는 조각들을 살폈다. 맨 앞장 그나마 덜 탄 부분을 열었을 때 모서리만 그을린 사진이 남아있었다. 사진을 받아 든 신은 이상한 느낌에 손에 들고 있던 망가진 사진과 타다만 사진을 나란히 두었다.

 

 

같은..사진 입니다.”

유준의 멍한 목소리와 함께 신의 머릿속에선 왕욱과 영왕. 그리고 영왕과 김정철에 대한 정리가 세워졌다.

 

 

 

 

 

정말 그 사진 속 어린애가 왕욱의 아들이면 영왕의 주인은 그 놈 이겠군…”

돌아가는 차 안에서 신은 창 밖의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고 앉아서 중얼거렸다.

 

 

김정철은 누구보다 조직을 아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돕는 왕욱이 꼴 보기 싫었겠지.”

 

그럼 형님이 자리에 오른 지금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뭔가.. 걸리는 게 남은 거야. …왕욱의 아들.. 그 아들이 아직 살아있으니까.”

신의 헛웃음이 차 안을 가르고 퍼졌다.

 

영왕의 주인이 왕욱의 아들이라면 왜 지금까지 아비를 죽인 자신을 살려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김정철이 숨은 것이 왕욱의 씨를 제거하기 위함이고 화룡을 돕기 위함이라면 위험한 모험을 한 번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강원도 쪽에 공기 좋은 곳으로 숙박 잡아. 애들 데리고 가서 머리 좀 식히자.”

술 한잔 하고 다들 풀어진 상태에서도 영왕이 그 허점을 가만히 보고 있을 지 만약 움직인다면 김정철은 어떻게 나올 지. 모 아니면 도, 아니 빽도의 확률에 신은 발을 내딛었다.

 

 

 

 

나도 갈래요.”

짐을 싸는 신의 옆에서 여는 부루퉁한 얼굴로 졸졸 따라다녔다.

 

놀러 가는 거 아니야.”

 

그냥 내가 가는 게 싫은 거죠

 

아니야.”

우뚝 멈춰 선 신이 쐐기를 박아 부정해도 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그럼 왜 나만 두고 가느냐구요.”

 

 

의사선생 다칠까 봐.”

신의 입장에서는 배려였지만 여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불안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김신씨가 나 지켜주면 되죠.”

순간 흠칫 하고 흔들린 마음을 이성이 다잡아 주었다.

 

설마 나 못 지켜 줄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이성 끈이 탁 하고 맥 없이 끊어졌다. 자존심을 긁는 계략에 넘어간 신은 이내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여를 포함해 강원도에 도착한 이후였다.

 

 

 

와아ㅡ 바다다!”

 

놀러 온 거 아니라니까. 의사선생은 내 옆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마.”

잔뜩 예민한 신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여는 알았다고 대충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데나 막 돌아다녀 신의 골치를 상당히 아프게 했다.

 

 

첫날 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 신은 여에게서 눈을 고정시킨 채 유준을 불렀다.

 

이상한 건.”

여는 이곳 저곳 잘도 돌아다니며 굿 나잇 인사를 하고 있었다.

 

 

없었습니다. 이 근방으로 들어온 차량들은 다 확인 했습니다.”

신은 이쪽을 보고 크게 손을 흔드는 여를 보고 웃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웃음을 참고 한숨을 쉬며 허공을 바라보는 신의 뒤로 나무가 인위적인 마찰을 일으키며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 든 신과 유준이 나무쪽을 겨누었지만 움직임은 천천히 멈춰져 갔다.

 

 

“..? 김신씨! 방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스무 발자국? 아님 그것보다 더? 멀다면 멀고, 아니라면 아닐 거리에서 여가 자신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기름냄샌가…”

코를 킁킁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여의 너머로 신은 붉은 점 같은 것이 일렁이는 걸 보았다.

 

 

설마.

 

의사선생!”

신의 외침에 여가 이쪽을 보고 돌아섰다. 그 뒤로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불꽃이 미끄러운 바닦을 타고 순식간에 화염이 되어 여를 그늘지게 했다.

 

 

 

 

타는 냄새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몽롱한 정신에서 그것만 알 수 있었다. 몸을 끌어 안는 손과 서늘한 공기가 차례로 느껴지고 뒤 이어 시끄러운 소음들 사이 애탄 부르짖음이 들려 왔다. 그리고 한참을 덜컹거리더니 눈 앞이 확 밝아졌다. 다시 끝없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띠ㅡ 띠ㅡ

 

 

일정한 간격의 소음이 잠을 방해했다. 묵직하게 눌려진 듯한 전신의 감각에 겨우 눈만 뜰 수 있었다. 그조차도 한참 동안 밝은 조명에 실눈을 뜨고 있어야만 했다. 유달리 따뜻한 오른 손의 느낌에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익숙하게 느껴져 버리는 남자가 오른 손을 붙잡은 상태로 침대에 얼굴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딱 봐도 불편한 자세인데 그 남자는 아주 오래 그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불길이 나를 덮친 것이 심장까지 닿지는 않았을 텐데 심장이 아파서 여는 가쁜 숨을 쉬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과 같으면서도 또 달랐다.

 

 

, 이건 사랑이구나.

 

 

 

큰 일이 났다는 걸 알았다. 그를 사랑하지 말아야지 했던 각오는 이미 물렁한 젤리처럼 되어 힘을 주지 못했다.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여의 눈에 눈물이 고여 흘러 내렸다.

 

 

자책, 슬픔, 그럼에도 사랑.

 

 

그리고 이 사람. 김신.

 

 

 

그가 나의 곁에 있어줘서 속도 없이 좋다는 안도감이 번진 눈물의 이유였다.

 

 

 

 

 

깨워.”

신의 말에 조직원 중 하나가 의자에 묶여 있는 남자에게 물을 끼얹었다. 여를 병원으로 옮긴 직후 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경찰보다 빠르게 범인을 잡아오라는 것이 그의 명령이었고 잡았다는 소식이 없던 일주일 동안 신은 그 어느 때보다 난폭해졌다.

 

[형님. 잡았습니다.]

수화기 너머 유준의 말에 신은 깨어난 여와 함께 있다가 한달음에 지하실까지 차를 몰았다.

 

 

희미하게 눈을 뜨는 남자의 얼굴엔 끔찍하게 남아있는 긴 칼자국이 보였다.

 

 

김정철..”

신이 느리게 걸어가 그 앞에 섰다. 정철은 제 앞에 선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더니 피식 웃고 고개를 저었다.

 

 

넌 지금 잘못 짚었어.”

 

무슨 말이지.”

 

여기에 잡아둬야 할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구타로 인해 부어 오른 오른쪽 눈은 더 이상 쓸 수 없어 보였다.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야 하는데.”

 

“….왕욱의 아들.”

신은 그가 보지 못하게 살짝 웃었다. 드디어 원하던 대답이 나와 일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누구지?”

신의 말에 정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지하실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니 옆에 있더군. 아주 잘 숨어서. 이 정도를 말해주었는데도 네놈이 그런 표정이라면 니 놈도 내가 모실 위인은 아니구나. 화룡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어.”

 

 

 

입을 다시 열 때까지 물 한 모금도 주지마.”

아직도 미치광이처럼 웃고 있는 정철을 두고 신은 지하실을 나왔다.

 

 

 

.. 형님. 지금 여기 의사선생님이 와 계십니다.”

병원으로 돌아가려던 신을 막은 건 유준이었다. 유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병원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여가 신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왜 나왔어. 아직 퇴원 일 아닌 걸로 아는데.”

신이 받던 전화 너머 김정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여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 혹시라도 그가 신에게 자신에 대해 말 했을까 불안해 병원에서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여는 차마 진실은 말도 못하고 신을 끌어 안아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려 했다.

 

 

여기 보는 눈들..”

 

싫어요이러고 있을래요.”

지금의 반응으로 봐서는 아직 그자가 입을 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이 먼저 감지했다. 그 사람을 살려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잠든 신을 두고 여는 신의 사무실에서 조심스럽게 빠져 나왔다.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 신의 말에 가기 싫다고 안겨 들어 신의 사무실에서 일을 치렀다. 신이 씻는 사이 그의 물에 의무실에서 가져온 수면제를 타고 잠든 척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제 아침까지 신은 깨지 못 했다. 그러고 보니 누가 약을 탈까 밖에선 절대 뭘 안 마신다고 했는데 그게 자신이 되어 버려서 여는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지하실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없어 여는 생각보다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정철이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걸어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왕여..”
지하실 안의 불빛이라고는 정철의 머리 위해 희미하게 매달린 전구 하나뿐이었다. 그 빛이 닿는 곳까지 다가온 여를 본 정철은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김신에게 말 했어?”

 

 

그 멍청이는 내가 준 힌트로도 널 찾지 못하더군.”
두서 없는 질문에도 정철은 여의 불안을 간파하고 웃었다. 여는 조급해진 마음에 뒤 주머니에 감추어 둔 주사기와 작은 약병을 꺼냈다. KCL이라고 적힌 약병에 들어 있던 약물을 주사기로 빨아들이고 오롯이 김신 하나만을 염두에 둔 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철의 목에 그 주사기를 찔러 넣었다.

 

 

 

왕욱은! 뒤 늦게 찾은 아들놈 하나 때문에 조직을 망쳤어! 그 놈이 잘못 한 거다! 그 놈ㅇ….”

정철은 죽음의 문턱에서까지 여에게 발악을 하며 죽었다.

 

죽어줘, 제발.”

이미 죽은 정철에게서 여는 한 발자국 물러났다. 주사기와 약병을 내일 새벽 일직이 거두어 갈 쓰레기 더미 안으로 던지고 덜덜 떨리는 몸으로 신의 방 문 앞까지 왔다.

 

 

 

달빛조차 그가 서 있는 복도를 비춰주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어, 내가.

 

 

 

여는 애써 넘어오려는 구역질을 참으며 흐르는 눈물을 꾹 눌러 막았다. 저 안에 있는 남자와 행복해지려면 이 정도 희생은 약소한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러나 그 날 밤. 아버지는 또다시 나의 꿈에 나타나 정철과 같은 모습으로 신을 죽이라. 말했다.

 

 

 

 

씨발!”

지하실 안. 김정철의 시체는 어제 모습 그대로 의자에 묶여있었지만 의식 없이 늘어져 있었다. 신은 이마를 짚고 바쁘게 돌아가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겨우 영왕의 꼬리를 잡았구나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놓쳐버리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김정철은 실종이라는 공식적인 이름표를 단 채 신의 조직 내에서 죽어버렸다.

 

 

 

김정철을 죽인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신은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범인은 영왕이었다. 김정철의 망설임이 모든 걸 망쳐 놓았다. 하지만 이런 신의 결정에 누구보다 안도한 것은 떨리는 손을 감추고 있던 여였다. 신은 여전히 여를 의심하지 못했다. 그저 위로 받으려 하고 끊임없이 사랑하기만 했다. 그럼 여는 한숨 가득 한 신을 끌어 안고 이를 악물었다.

 

 

살인의 가책이 뼈 저리게 느껴졌다.

 

 

이 남자를 사랑해서 살인까지 한 거라 합리화 했는데 살인의 고통을 겪고 나니 오히려 이 남자가 더 무서워지고 아버지의 환영은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런 복잡한 마음의 여를 알 리 없는 신은 일과 사랑을 분리했다. 신의 고백은 여의 혼란에 결정적인 한 발의 화살이 되었다.

 

 

 

처음 함께 밥을 먹었던 그 곳에서 신은 여의 앞에 단순한 모양의 반지를 올려두었다. 다이아가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박혀 있는 그 반지의 다른 한 쪽은 이미 신의 왼손에 끼워져 있었다. 여는 말 없이 자신의 쪽으로 넘어온 그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 마음이 단순한 복수심이었다면 저 반지를 당당하게 손에 끼우고 당신을 사랑한다 고백하고 웃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 진심이어서 저걸 끼우는 순간 그에게 정말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설마 의사선생도 오글거리게 손에 끼워주길 바라나?”

신은 눈치 없는 게 아니었다. 그저 여를 너무 사랑해서 이런 바보 같은 말도 할 수 있었다.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은 신이 정중하게 여의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잘 어울리네.”

알고 한 건지. 사이즈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반지는 뭘 알지도 못하고 저 예쁘다고 반짝거렸다. 뜨거운 응어리가 저 안에서부터 열을 내며 올라왔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대로 된 고백을 한 적이 없는 것ㄱ…”

신의 말을 여가 막았다. 테이블 위로 팔을 길게 뻗어 신의 양 볼을 잡아 끌어 당겼다. 갑작스러운 여의 행동에 신은 눈도 감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엉겨오던 혀가 잠시 떨어져 나가 공기 빠지는 소리를 냈다.

 

 

사랑해요.”

여는 울고 있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이같이 울면서 그렇게 몇 번이고 되풀이 하며 말했다. 우는 얼굴을 닦아 준 신이 울지 말라고 다독여도 여는 끊임 없이 울었다.

 

 

 

하고 싶어요.”

?”

 

하고 싶다구요. 앞 뒤 없이 여는 테이블 위를 기어 올라가 신의 넥타이에 손을 뻗었다.

 

 

조금 더요.

평소에는 얼굴만 붉히고 끙끙거리던 여가 오늘따라 신보다 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위를 올라타 허리를 움직이는 가 하면 신의 몸을 더듬어 집착하듯 안고 흔적을 남겼다.

 

 

손에 닿고, 등 허리에 닿고, 엉덩이 사이로 끊임 없이 그가 닿아도.

 

붙잡고, 매달리고, 안겨 보아도 그가 허상인 것만 같아서 여는 찰나라도 신이 떨어지려 하면 빠져나가려는 신을 붙잡고 도리질을 쳤다.

 

 

 

 

서럽게 울면서도 우는 얼굴이 그에게 미워 보일까 싶어 입술을 깨물어 눈물아 들어가라 빌었다.

 

 

 

 

 

 

그날도 여는 앓아 누웠다. 반지는 여전히 손에 끼워진 채 여는 고열과 두통에 병원을 집보다 더 자주 들락날락 했다. 신을 볼 수가 없어서 영왕의 자신을 기다리는 조직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데려가. 하고 말했다. 그렇게 신과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헤어짐은 길지 못했다.

 

 

 

 

형님 지금 영왕이!...”
여가 갑자기 사라지고 신은 미친개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가 일년 같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거슬려서 그의 사무실엔 부서진 가구들이 즐비했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의무실 바닥에 주저 앉아 여와 나눠 낀 반지를 보고 부모님이 죽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렸다. 영왕이 기습해 왔다는 유준의 말에도 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형님!”

유준이 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어도 신은 허망하게 웃으며 아직도 이 곳에 남아 있는 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영왕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소음이 확연히 들리기 시작했고 유준의 얼굴이 차츰 선명하게 보였다.

 

 

?”

 

영왕이 이곳에 왔습니다! 형님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우리 애들 다 죽습니다!!”
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가 깨지고 뒤 없는 비명의 소리를 들었다. 분노가 머리 끝에서부터 그의 살을 떨리게 만들었다. 모조리 다 죽여야겠다. 복도로 나온 신은 난장판이 된 자신의 구역을 보았다.

 

 

 

그 순간에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여 조차도 신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뜨거운 총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도 신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양 앞으로 나아갔다.

 

 

김신씨!”
그러다 문득 꿈 같은 목소리가 신의 발을 붙잡았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는 신의 등 뒤로 총알이 박혔다.

 

 

 

왕ㅇ!....”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신을 여가 붙잡아 세웠다. 영왕의 쪽에서 사격을 중지하자 화룡도 대치 상태에 접어들었다. 신은 까무룩한 정신에도 혹시 여가 총에 맞을까 여를 안아 영왕의 쪽에서 보지 못하게 했다.

 

 

 

안돼, 여기 왜 왔…”

그렇게 기다렸는데 왜 하필 이 순간에 여가 온 것인지 타이밍 참 뭐 같다고 신은 생각했다. 여는 이 순간에도 여만을 지키려는 신에 울컥 하고 목구멍을 따라 울분이 넘어왔지만 자신을 감싸 안은 신의 뒤에 손을 둘러 그대로 신의 머리를 겨누었다.

 

 

 

아버지는 이런 걸 바라셨겠지.

 

 

철컥.

뒤 통수에 닿아오는 차가운 총구의 감촉에 신은 숨을 들이 마셨다. 몸 안의 여는 덜덜 떨리면서도 총을 잡은 손은 떨림이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세상이 무너지고 하늘이 꺼지고 내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기분이었다. 이명이 울리고 그간의 시간들은 빠르게 지나가 나를 배반하고 다시 거꾸로, 위로 흘렀다.

 

 

 


신이 여에게서 손을 떼고 얼굴을 들어 올리자 여는 천천히 총구를 돌려 신의 이마에 겨누었다. 엉망이 된 얼굴이 누굴 생각나게 해서 여도 미칠 것 같았다.

 

 

 이제 되었나요 아버지.

 

 

총 버려. 안 그럼 김신은 죽어.”
여의 말에 조직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총 버리라고! 아니면 김신을 내 아버지와 똑 같은 꼴로 만들어 주겠어.”
신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고인 그의 눈과 대조되게 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화룡의 조직원들이 모두 총을 버리고 무릎을 꿇자 여의 조직원 중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형님.”

신은 고개를 숙인 그 남자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건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지금 날 겨눈 저 남자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상황이 너무 이해가 되질 않아서 신은 멍한 눈으로 여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머지는 다 죽여.”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총 소리에 신의 몸이 흔들렸다.

 

 

발치에 닿아오는 선혈이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생사를 함께 했던 모든 이가 그렇게 여의 한 마디 말로 저승의 문턱을 넘었다. 한마디 안녕도 얼굴 마주볼 틈도 없이 그렇게 죽어버렸다. 신의 두 손이 등 뒤로 돌려져 묶였다. 영왕이 끌고 온 차에 타서 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죽인 왕욱. 그리고 영왕의 주인. 그 모든 게 바로 나야. ..반드시 너를 죽일 거야.”

너를 죽일 거야.

 

 

 

. 그럴 거야.

 

 

 

 

 

혼자 방 안에 가두어져 있던 신은 시간이 지나자 차츰 모든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조치를 취해주어 상처에선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신이 했던 모든 일의 옆을 지켜 준 유준이 생각났다. 그도 소리 없이 죽었다. 마지막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보내버렸다. 신은 좁은 방 안이 울리도록 소리를 질렀다.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던 신은 정신병자처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잇새 사이로 여의 이름이 나지막이 세어 나왔다. 죽어버린 민들레처럼 의미 없이 허공에 몇 번을 되새기다가 신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정말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씨발.

 

 

망할 사랑이 뭐라고 이 순간에도 눈치 없이 심장은 반응했다.

 

 

 

“…일어났네.”
한참 그렇게 욕을 하고 있을 때 철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여가 들어왔다.

 

 

 

너 뭐야.”
증오인지, 떨림인지 모를 것들을 억눌러서 말 하느라 신의 목소리는 잔뜩 떨려서 나왔다. 여는 신의 앞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여에 신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처음 마주친 그날. 나보고 그렇게 담배피지 말라고 하더니.

 

 

 

 

뭘 웃어.”

큰일 나서.”
여가 담배를 문 이유는 본인의 떨림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나마 이거라도 피우면 나아질까 줄담배를 피워대며 손에서 내려 놓질 못했다.

 

 

나는 왜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도 의사선생 보니까 심장이 막 좋대, 좆 같게도 사랑한대.”
여는 그 말을 듣고 굳어버렸다. 정말 왜 이 남자는 나를 사랑했을까.

 

 

 

내가 사랑이라고 말 한 것들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당연히.”

왜요?”

 

 

내 사랑에 질문은 없었으니까.”

 

일말의 의심도, 사랑하지 않은 적도 없었으니까.”

 

 

여가 떨어뜨린 담배는 둘이 입을 맞추는 동안 식어갔다.

 

 

난 아직도 믿어. 당신이 지금 나를 진심으로 사랑할 거라고.”

울보.

 

눈물이 터져버린 여를 신은 묶인 손이라 쓰다듬어 주지도 못했다. 여는 그런 신의 어깨에 기대어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내가 그렇게 말 했잖아요. 나를 사랑하지 말라고! 수 많은 경고를 했는데 왜…”
비참한 기분이 들어서 여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말을 멈췄다.

 

 

어쩔 수 없는 걸까. 아님 이게 진짜 신의 벌인 것인가. 아직도 나는 확실하게 그를 사랑하는 게 맞아서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주저 앉았다.

 

 

 

내가 말했죠. 사랑이 모든 걸 해칠 거라고. 우리 이제 모든 걸 잃었으니 내 말이 맞았네요.”
올려다보는 여의 말에 신은 그보다 여유 있는 얼굴을 했다.

 

 

아니. 난 아직도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 놈의 아직도. 그는 꼭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것처럼 말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끔찍한 환청을 듣고 하루에도 그에게 수십 번씩 죄를 지어가며 살 용기가 없었다.

 

 

 

이제 더 애쓰면서 살지 말아요. ? 어떻게든 사는 건 하지 말아요 우리.”
품 안에서 여는 아까 신을 위협할 때 썼던 그 총을 꺼내 들었다.

 

 

 

그것도 당신이 하고 싶으면 나는 그렇게 해.”

마지막까지 신은 여의 편에 서겠다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 연애 했나요?”

 

당연히.”

 

 

우리 행복했나요?”

 

당연히.”

 

 

그럼 당신 나를 사랑해요?”

 

 

확실하게 예스.”

 

 

난 미쳤다고 그거라도 좋네요.”

 

 

 

 

사랑 가득한 행복한 연애 했으면 우리 그걸로 만족할까요.

 

 

당신이 더 이상 살아갈 용기가 안 난다면. 난 죽어서라도 당신을 지켜야지 뭐 어쩌겠어.

 

 

 

딱 한 발 들어 있던 작은 죽음은 둘의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이것 봐요. 너무 사랑하면 심장이 터질 수도 있다니까.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웃기지도 않고 흘러 지나갔다.

 

 

 

 

 

 

 

 

 

김신씨, 그거 알아요? 결국 이 붉은 피도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암흑과 만나면 검게 물들어 버린다는 거?

 

 

 

 

 

N O I R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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