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님
미완의 봄 prologue 본문
봄 햇살이 찬란하다. 나도 네 인생에서 찬란한 순간이었을까.
Pro.
말을 잃었다.
집 안은 침묵만이 존재했다. 하는 일이라고는 혼자 덩그러니 소파에 기대앉아 티비 속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뿐 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저들이 즐기는 평범한 일상에 울었다. 나를 떠나간 수 많은 존재들 중 가장 내 옆을 지킬 것만 같았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울다 보면 해가 질 때도 있었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도 있었다.
항상 누군가의 손길에 반짝거렸던 테이블 위엔 구겨진 맥주 캔들이 쌓여갔다. 곱게 개어진 수건은 더 이상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고, 다림질을 한 옷을 입어본 기억도 까마득했다. 하긴, 나에게 ‘까마득’ 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도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이 까마득하게 먼, 이제는 영영 잊을 수도, 영영 지울 수도 있는 것들 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환청을 들었다. 잔소리던, 사랑이던, 무언가 재잘거리며 나에게 말을 거는 소리들이 들려서 나는 항상 요리한 음식을 그 자리에서 먹어 치웠다. 배가 고파서 먹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먹는 것을 행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아, 웃기지도 않는 소리. 아직도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검 마저 사라졌으니 이젠 정말 죽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둘러 죽고 싶었다. 네가 저승의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릴 것만 같았다. 아니면 검은 모자를 쓰고 내 시체 옆에 앉아있는 내 이름을 불러줄지도 몰랐다. 아마 네 방은 먼지가 가득할 게 분명했다. 그 방은 주인을 잃은 후로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으니, 먼지가 떨어진 자리에 쌓일 것은 먼지뿐이 없었다.
인간의 약은 당연히 내게 효능이 없었다. 그럼에도 습관처럼 먹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남은, 아니 영원할 내 삶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집 안 여기저기에 남은 것들엔 온통 한 사람의 흔적밖에 없어서, 나는 잊으려는 와중에도 덧없이 울었고, 하지 말아야겠다는 누구의 생각을 끝도 없이 했다. 주변이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그냥 스쳐 지나는 바람이나, 떨어진 낙엽 하나에도 괴로웠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마냥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리운 누군가를 대입시켜서 연관 지었다. 어느 날은 미친 듯이 온 집 안을 부숴 놓았다. 온전한 공간은 네 방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 했다. 일부러 미친 척을 했다. 미쳐야지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흐린 날이 계속되었다.
너의 마지막을 다시 기억하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새벽이었다. 새벽은, 네가 가장 바쁜 시간이라서 나는 네가 집을 나서면 잠도 잊고 너를 기다렸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돌아오지 않을 너의 소식은 별로 반갑지 않은 얼굴에서 들었다. “어쩐 일이야.”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누가.” “선배님이요.” “헛소리 지껄이지마. 죽기 싫으면.” 겁이 나서 말이 험하게 나왔었다. 내 예감이,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이 되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눈으로 보았다. 한 마디 말이라도 하고 떠났으면 덜 했을까 하는 부질없는 미련들이 가득했다.
원망은 넣어두기로 했다. 나 스스로도 내가 불쌍했지만 내 사랑이 더 가득했다는 것이 내 죄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벌을 받는 것에는 익숙했다. 가끔은 입가를 비집고 나오는 웃음들의 의미가 허탈감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그저 연기가 되어버린 추억의 조각들이 나를 다시금 긋고 지나가서였다. 그 조각들은 베이지 않을 수 없이 날카로워서 나는 이제 갈가리 조각난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너와는 오지 못했던,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는 눈을 돌려야 했다. 너를 동정하기만 하게 될 까봐. 너는 충분히 행복했고, 너는 분명 좋은 삶을 살다 간 것인데 그 것을 나의 동정으로 인해 더럽히게 될 까봐.
그 날도, 눈을 감았다.
“야야 혁아 오늘 학원 가냐?”
“시X 오늘 영어 보충까지 있어.”
절대 너와는 어울리지 않는 욕설이었다. 그것까지도 ‘어리다’의 패기라고 생각해 눈을 뜨고 단순히 호기심에 돌아보았다. 교복을 입고 입에 막대사탕을 문 아이가 내 옆을 지나쳤다.
“뭐예요.”
본능적으로 내 손이 지나던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다시는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여야.”
“네?”
내 여, 내 왕여. 꿈에 그리던, 그렇게 내 고통을 옥죄이던 네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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